박정희의 진실 1. 대통령의 술과 여자 그리고 유신 세상사

10·26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김재규를 민간 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 타당한지 여부다. 또 사형집행이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나 과도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점, 특히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는 점이다. 

첫째,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만 지역 계엄령이었으며 전국적으로 평상 상태였다. 계엄령은 10·26이 일어난 다음날 발동된다. 따라서 평상시에 발생한 10·26사건의 중심인물인 김재규는 헌법상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 적용으로 위헌이었다. 10·26사건 관련자들 중 군사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 한 사람뿐이었다. 

둘째,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며, 그로부터 불과 나흘만인 5월 24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는 전두환의 하나회 세력이 중심인 신군부가 5·18광주항쟁을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광주의 전남도청에 발포, 점령함으로써 진압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격동의 와중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처형함으로써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왜 김재규는 박정희를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나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10·26과 관련해 중요한 의문 중의 하나는 김재규가 왜 그렇게 박정희를 단호하고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후에 군사법정에서 중정요원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박정희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것을 알았으면 제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박정희가 사라져야 할 권력자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총알은 딱 두 발이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가 아니었다. 재차 발사하려 했을 때 김재규의 콜트사 제품 권총은 찰칵 소리만 낼 뿐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고장난 권총을 들고 밖에 나가 박선호가 서 있자 그의 권총과 바꾸어 갖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모 대학 재학 중인 패션모델 정혜선(가명)양의 무릎에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군사법정 진술과 현장검증에서 확인한 바로는 50cm 이내의 거리였다. 정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실내 화장실로 튀어 들어 피신했고 동석했던 가수 손금자(가명)양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최후의 일발을 가격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 2기 동기생으로 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핵심 자리를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사이에 확인사살이란 인간적 환멸과 증오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재규의 그런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옛말에 "소인은 혁면(革面)하고 군자는 표변(豹變)한다"고 했다. 혁면이란 얼굴, 즉 안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변덕 부리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그 변덕의 한 단면을 혁면이라고 묘사했다. 그에 비하면 군자는 말이 없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번 마음 먹으면 얼굴 표정 바꾸는 변덕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표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잘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덕으로 신임을 거두어들이는 혁면이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표변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재규는 유신 이후 박정희의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함께 "미국 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 등의 반미 발언으로 국가안보 위기를 절감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혁면에 그치지 않고 표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력자로서 변덕과 주색에 빠진 사생활 문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야수'와 같은 표변을 불러 일으켰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술자리 여자를 구해오던, 그 시절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유신독재의 문제와 한미관계의 파탄을 주로 비판하면서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마음 속 창고에는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감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에 담긴 군사법정의 문답내용을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을 처음 감지한 사람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담당한 변호인이었다. 박선호 담당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그의 사건 가담 동기와 그날의 행적 등을 정리하다가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려감을 느꼈다.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동석했다는 여인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바깥에서 술자리 여자를 구해 오는 '채홍사' 역할을 고정적으로 해야 할 만큼 박정희의 주색은 병들어 있었다. 

▲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궁정동 현장.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숨을 거뒀지만, 유신정권은 1970년대 내내 각종 위기상황을 겪어야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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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11일 오후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4회 공판. 


강신옥 변호인
 :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의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네, 그렇습니다."
변호인 : "… 대통령이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고 말하고,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올 때는 '대행사'라고 한다는데…." 
박선호 :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 관계는 참고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박선호의 답변은 목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무언가 꺼리는 말투가 역력했다. 강 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싹 다그쳤다. 박정희의 부도덕성과 타락상이 부각될 수록 '10·26거사'는 그만한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 : "아까 검찰관 신문 시 얘기하다 말았는데 당일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 네."
변호인 : 거기에 간 것은 그 날 연회를 도와 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군사법정을 울린 김재규의 한 마디..."야, 그 얘긴 하지마!"

군사법정에 긴장이 흐르는 사이 작은 외침이 울려 나왔다. 

"야, 그 얘긴 하지마!"

피고인석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기 위해 소리쳤다. 이에 박선호도 '양심선언'의 기회를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그날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 문제를 더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고 하소연 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제가 근무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부장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신임하시고 자꾸 계속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인 : "차 실장은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까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한 푼도 도와주지 않고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그러면 당신이 골라서 해라'고 했다면서요? 그랬더니 '청와대에서 고른다는 걸 국민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골라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 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 "…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국가정보기관의 간부로서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오명까지 쓰게 된 박선호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이에 강신옥 변호사는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교도소 접견 때 이미 그에게서 확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공개해 나갔다. 


▲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10·26에 대한 계엄사 보통군법회의가 끝난 뒤 1980년 1월 중순부터 담당 변호사들은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 여자로 시중에 나도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은밀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법정진술에서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 일절 함구하던 김재규는 어느날 담당 변호사 한 사람을 보자고 연락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여러 비화를 털어놓았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심경의 변화를 보인 모습이었다. 중앙정보부 비밀안가를 거쳐 간 은막의 스타들에서부터 대통령의 자녀에 대한 얘기까지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정희의 비밀안가에 다녀 간 외부 여자가 어림잡아 200명 이상에 달한다는 얘기였다. 김재규는 또 자신이 박정희로부터 신임을 잃기 시작한 이유가 그의 자녀들 문제를 직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탤런트들, '더 깊은 곳' 들어갔다 울고 사정해 빠져나오기도

변호사들은 박선호의 전임 의전과장들을 찾아 청와대 안가 술자리와 여자에 대해 검증하기로 했다. 전임 '채홍사'들인 윤아무개, 이아무개, 김아무개씨(육사15기, 예비역 대령)로부터 김재규의 접견 내용을 검증했다.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인 C, C', C", L, L', W씨 등이 비밀안가의 깊숙한 곳까지 거쳐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모의 H, K씨는 안가의 깊은 곳까지 갔다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빠져 나왔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박정희의 주색 행사는 꼭 부인 육영수씨가 서거한 뒤부터 외로워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육씨가 살아 있을 때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았다. 육씨의 얼굴에 멍 들어 있는 것이 청와대에 접견 차 갔던 외부 여성인사에 의해 목격되기도 했다. 출입기자들이 넌지시 묻지만 박정희의 언짢은 헛기침 하나로 그냥 지나가기 일쑤였다.  

1973년 청와대에서는 경호실장이 사정수석비서관의 방에 가 엽총을 난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경호실장은 박종규, 사정수석은 홍종철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육영수씨가 사정수석을 시켜 경호실장의 뒷조사를 한 것이었다. 육씨는 박정희의 옆에 딱 붙어서 술과 여자까지 챙겨주는 박종규를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했다. 

육씨는 사정수석이던 홍종철에게 박종규의 부동산 보유 현황과 사생활 등을 조사하도록 부탁했다. 우선 박종규의 비리를 캐야 그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수석실의 움직임은 박종규의 정보망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를 알아 챈 박종규는 엽총을 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들어 소리쳤다.

"야, 홍종철. 당신이 내 뒷조사를 한다며!" 

격분한 박종규는 엽총을 두어 발이나 쏘았지만 총알은 천장에 맞고 튀어 나갔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이 한 행사장에서 차지철 경호 실장 등과 함께 자료를 보고 있다. (왼쪽에서 2번째부터 차지철, 박정희,이상열,박종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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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씨가 생전에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박종규였던 것도 박정희의 술과 여자 때문이었다. 박종규는 육씨가 1974년 8·15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숨진 뒤에야 그 책임으로 경호실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아이러니 이상의 기구한 운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에 관한 비화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만 해도 훨씬 더 많다. 비화를 더 들출 것도 없이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금언을 그대로 입증한 셈이다. 민주정부의 기본 조건은 견제와 균형이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장이든, 대법원장이든, 아니면 중앙정보부장이든 검찰총장이든 모든 국가권력은 견제받는 장치가 있고 상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제 멋대로 휘두르지 못한다. 견제 없는 절대권력자는 반드시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전횡하고 결국 인간의 약점인 도덕적인 금도를 벗어나 쾌락 추구에 빠지고 만다.  

유신은 국민기본권 말살한 '현대 절대주의' 체제 

박정희가 강행한 유신체제야말로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영구히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주정치의 조건인 권력분립과 국민기본권 보장이 무시되고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주의 체제였다. 

첫째,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근거한 개헌이 아니었다. 집권세력이 자의로 작성한 것이어서 사실상 '사문서'나 다름없다. 국민투표도 온갖 부정 투표였다. 그런 국민투표를 통과했다고 해서 그 이전의 위헌적 절차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특별선언과 비상조치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것은 초헌법적 체제 파괴로 사실상 '내란행위'였다.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은 규정돼 있지 않았다. 이는 대통령제를 운영하는 민주 헌정이라면 어느 나라든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규범이다. 

유신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과 1948년의 제헌 헌법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이념으로 이어져 온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국민 주권의 기본규범을 상실한 이단적 통치규범일 뿐이다. 

둘째,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한 뒤 비상국무회의에 유신헌법안을 회부해 의결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되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 대표기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국무회의가 국회의 권능을 대신한 것은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본질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행정부가 입법권까지 행사했으니 이야말로 민주주의 사상가들이 우려한 국가권력의 독점이며 전제체제였다.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한 유신헌법은 집권자가 자기 권력을 자의로 만들어 갖는 절대군주의 행위나 다름없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정치 코미디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유신헌법은 법적으로 원천 무효일 수밖에 없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90% 이상 지지는 공포정치의 산물 

▲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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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박정희의 후계 진영은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률이 모두 90%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고 내세운다. 이른바 개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실시됐다. 언론의 비판적 보도도 금지됐다. 더구나 비상계엄령이 지속되고 군 탱크가 진주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이러고도 무슨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니, 국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하는 행태다. 세계 정치사에 그런 선거나 투표가 있은 적이 없다. 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이른바 '95% 이상 찬성률 공작'이라는 지침을 행정부 공무원들과 관변단체, 그리고 군 간부들에게 강요했다. 

나는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 반독재 학생운동을 하다가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제적당한 채 군대에 강제입영된 소총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 대학의 학생간부 177명을 체포, 고문조사한 뒤 모두 제적시키고 군대로 끌어 넣었다. 그것은 다음해 유신체제를 강행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그 유신헌법의 국민투표를 군대에서 맞은 나는 강압, 공개, 대리 투표의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투표일 아침부터 기표장소는 비밀보호 장치는 아예 없었고 중대 인사계가 한 명씩 들어가는 사병들에게 투표용지를 들이밀었다. 인사계는 투표지의 반대란을 아예 손으로 가린 채 찬성란만 펴서 내밀고 기표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투표할 것을 미루고 있다가 대대장 앞에 불려갔다. 철책선 아래 중대장 막사에 나타난 대대장과 오전 내내 면담이란 것을 했다. 나는 그래도 독대하는 자리여서 대대장에게 항변했다. 

"이런 국민투표는 역사적으로 후대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대대장은 구구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워낙 골치 아픈 존재가 하나 자기 부대에 와 있는 것이고 또 보안부대도 그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시끄럽게 사고만 치지 않게 관리하면 될 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 상병, 차라리 투표하지 말지."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기권한 내 표는 어디로 가고 우리 대대는 1명의 무효표만 빼고 100% 찬성이었다. 내 표를 누군가 찬성으로 기표한 것이다. 무효표 하나는 어느 고참 하사가 인사계의 손에서 투표지를 나꿔채 반대란을 찍었으나 행정요원이 다시 찬성란에 기표한 것이었다. 그 하사는 보안부대에 불려가 폭행당한 뒤 후방으로 전출되고 말았다. 

▲  1972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신교 궁정동투표소에서 부인 육영수씨와 장녀 박근혜씨와 함께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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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한 뒤 만난 학생운동의 동료들은 국민투표를 모두 그렇게 경험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따위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의 지지율을 조작한 것이다. 나는 34개월 이상을 휴전선 철책에서 보초서는 '저항력 없는' 사병이었지만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내 손으로 하지 않은 것을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여긴다. 
국민투표란 직접민주정치의 한 형태지만 그 안건이나 선택지를 합리적 중간집단이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와 노조 등이 그런 중간집단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국민대표 기구인 국회는 물론이려니와 중간집단의 공론이나 검증 없이 집권측이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사례는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와 파시스트 체제가 대중민주정치의 형식을 통해서 배태된 것과 똑같다. 유럽에서 전체주의의 성립과정이 곧 민주주의의 불신과 위기론을 야기한 것도 바로 국민대중은 정치권력의 공작 대상이라는 사실이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넷째, 유신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수 없게 한 헌법조항을 없애 버렸다. 헌법에서 시민적 기본권을 삭제함으로써 후에 독재권력이 긴급조치로 제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신헌법은 또 형사법 절차에서 인권보장 장치인 구속적부심사제를 폐지했다. 

이것만 보아도 유신헌법은 시민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를 부정했다는 증거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신체의 자유를 축소한 것은 18세기 유럽 시민혁명이 쟁취한 초기의 자유민주주의 정신보다도 뒤떨어진 통치제도로 전락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18세기적 이념과 제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사고에 젖어 있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 사실상 임명해 의회정치 유린 

다섯째,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고 일반 법관까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해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인준받아 국회의원으로 임명했다. 또 본래 헌법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일반 법관은 법관추천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도록 규정했으나 이것도 대통령에게 맡겨졌다. 국회와 사법부가 모두 대통령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고 민주주의의 원리인 권력 분립은 없었다. 

권력 분립론은 절대주의 국가주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존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18세기 민주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확립됐다. 박정희 정권이 작성한 권력구조는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한 결과물이다. 그 귀결은 대통령의 절대권력 전횡으로 인권탄압, 언론탄압, 노조탄압과 야당탄압으로 야만국가 시대라는 불행한 역사였다. 

결국 대통령 박정희는 아무런 견제 장치 없는 절대권력자가 됐으며 그 결과 인간적 탐욕의 노예로 전락하는 전형적인 길을 가고 말았다.

박정희의 마지막은 바로 문란한 사생활에서 비롯 된것은 아닌지

역사는 기억되야 하며 반복 되어진다. 그리고 그 역사는 미화 되어서도 안되며 진실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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