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 프로 11월 11일 판매 시작 얼리어답터

아이패드 프로가 드디어 나온다고 한다. 

가격은 와이파이 버전만 판매하고  32GB 모델이 789달러(약 89만 9000원), 128GB 모델이 949달러(약 109만 4000원)로 책정됐다

아이패드 프로는 과연 PC의 몰락을 앞당기는 제품이 될 것인가?

팀국이 그랬다고 한다. " 아이패드 프로가 노트북이나 데스크톱의 대체제로 자리잡을 것”이라며 “아이패드 프로를 쓰기 시작하면 스마트폰 외에 다른 무언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

위 말 처럼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아이패드 프로는 애플 모바일 기기 가운데 가장 큰 12.9인치 화면을 제공하는 동시에 펜 입력방식과 스마트키보드를 함께 채택했다. 디자인과 필기는 물론 노트북이나 데스크톱의 업무 모두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에다 사양도 아이패드 에어2 보다 2배는 향상되고 그래픽도 두배로 향상 되어 사실상 PC급 성능이라는 데 

과연 대체제가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아마존 오프라인 서점 Open 얼리어답터


아마존이 온라인을 넘어 이제 오프라인에서도 책을 판다고 한다. 

아마존의 서점은 11월 3일,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문을 열었다. 

서점의 이름은 ‘아마존 북스’(Amazon Books). 아마존의 부사장인 제니퍼 캐스트는 전날인 11월 2일, 

이같은 사실을 발표하며 

“아마존 북스는 ‘아마존닷컴’의 물리적인 확장판”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온라인에서 책을 판매하며 쌓은 경험을 이 서점에 집약시켰습니다"

또한 온라인 책 쇼핑과 오프라인의 강점을 통합시키려 했습니다. 이 서점에서 판매될 책들은 ‘아마존닷컴’에서 고객들이

매긴 평점과 선주문량, 판매량, 굿리즈(Goodreads, 아마존이 인수한 도서추천 소셜 네트워크)에서 언급되는 비율, 

그리고 우리 큐레이터의 평가에 의해 선택될 예정입니다." 

‘아마존 북스’의 운영방식에 대해 제니퍼 캐스트는 시애틀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능한한 많은 책의 표지를 볼 수 있도록 진열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컴퓨터 브라우저로 보는 것만큼 책에 대한 많은 정보를 주기 위해서죠. 많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서가에 많이 꽂히는 것보다는 제대로 진열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책을

책등만 보이게 꽃는 게 책에게 매우 미안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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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책은 아마존닷컴의 고객들이 적은 평점과 리뷰와 함께 소개됩니다. 책을 사랑하는 아마존닷컴의 고객들이 

평가한 내용과 의견을 이용해 좋은 책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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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내의 어떤 섹션에서는 아마존닷컴 고객들에게 추출한 데이터를 이용해 타겟팅을 할 예정입니다.“ 태평양 연안 

북서부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혹은 “청장년을 위한 선물 : 별 4개 반 이상”과 같은 카테고리로 책을 소개하는 것이다. ‘시애틀 타임즈’는 이 방식이 “그동안 다른 서점들을 괴롭혀온 사업적인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팔리지 않아 먼지를 쓴 채 꽂혀있는 책이나 출판사로 반품된 책들을 이러한 형태로 다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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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북스’에서 판매되는 책의 가격은 아마존닷컴에서 제공하는 가격과 같다고 한다. 

온라인 세계 최대 샵인 아마존이 오프라인으로 진출은 무슨 의미일까??

출처: http://www.huffingtonpost.kr/2015/11/03/story_n_8458186.html


박근혜는 이화 교정에 발 붙일 자격이 없다(2015년 10월 29일 역사) 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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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독재 미화 국정교과서, 세월호 진실 은폐, 반여성 정책 추진하는 박근혜는 이화 교정에 발붙일 자격 없다! 

오늘(10월 29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리는 '제50회 전국여성대회'에 박근혜가 온다고 한다. 이 행사를 주최하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평범한 여성들의 처지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지지하는 상류층 여성들을 대변해 온 단체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이 행사에서 김활란 상을 시상한다. 일제에 부역하고 위안부 동원을 독려했던 김활란의 이름을 붙인 상을 주는 행사에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박근혜가 참석하는 것이다. 

박근혜는 무상보육 같은 자신의 대선 공약을 누더기로 만들었고,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요구도 철저히 외면했다. OECD 1위의 남녀임금격차와 세계117위 성 평등 지수(2014년 기준)가 여성 대통령 시대의 실상이다.  

박근혜가 청년과 여성을 위해 추진한다는 "노동개혁"은 전혀 청년과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개혁"은 임금은 깎고, 해고는 더 쉽게 하고, 비정규직은 더 많이 늘리는 정책일 뿐이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과 저질 일자리가 늘어나면, 그만큼 청년과 여성의 처지가 더 악화될 것이다.  

친일·독재·노동자 탄압의 역사를 미화하는 국정 교과서

박근혜는 수많은 역사학자와 교수님들, 학생들의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박근혜는 2013년 뉴라이트 <교학사> 교과서도 검정 통과시켜 준 전력이 있다. 이 교과서는 친일파 옹호는 물론이고, 이승만과 박정희가 자행한 노동탄압과 민주주의 파괴도 찬양한 저질 교과서였다. 이것만 봐도 박근혜가 만들 교과서에 들어갈 내용이 무엇일지 분명하다.  

게다가 오늘 11월 7일은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여전히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의 진실 찾기를 방해하고 있다. 그래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희생자 가족들은 애간장만 태우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희생자 가족들을 보상금으로 분열시키고 회유하는 비열한 짓도 저지르고 있다.  

 


우리가 박근혜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는 이뉴는 이 밖에도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박근혜 정부 3년 동안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더 팍팍해져만 갔다. 민주주의와 정의는 땅에 떨어졌다. 친일·독재를 미화하고, 반(反)여성 정책과 '노동 개악'을 추진하고, 세월호의 진실을 은폐하는 박근혜는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선배들의 정신이 서린 이화 교정을 밟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오늘 기자회견과 항의 행동으로 박근혜의 방문에 반대할 것이다. 더 많은 이화인이 참가해 항의의 목소리를 모으자. 

2015. 10. 29. 
노동자연대 이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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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박정희의 진실 1. 대통령의 술과 여자 그리고 유신 세상사

10·26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김재규를 민간 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 타당한지 여부다. 또 사형집행이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나 과도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점, 특히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는 점이다. 

첫째,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만 지역 계엄령이었으며 전국적으로 평상 상태였다. 계엄령은 10·26이 일어난 다음날 발동된다. 따라서 평상시에 발생한 10·26사건의 중심인물인 김재규는 헌법상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 적용으로 위헌이었다. 10·26사건 관련자들 중 군사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 한 사람뿐이었다. 

둘째,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며, 그로부터 불과 나흘만인 5월 24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는 전두환의 하나회 세력이 중심인 신군부가 5·18광주항쟁을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광주의 전남도청에 발포, 점령함으로써 진압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격동의 와중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처형함으로써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왜 김재규는 박정희를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나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10·26과 관련해 중요한 의문 중의 하나는 김재규가 왜 그렇게 박정희를 단호하고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후에 군사법정에서 중정요원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박정희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것을 알았으면 제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박정희가 사라져야 할 권력자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총알은 딱 두 발이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가 아니었다. 재차 발사하려 했을 때 김재규의 콜트사 제품 권총은 찰칵 소리만 낼 뿐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고장난 권총을 들고 밖에 나가 박선호가 서 있자 그의 권총과 바꾸어 갖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모 대학 재학 중인 패션모델 정혜선(가명)양의 무릎에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군사법정 진술과 현장검증에서 확인한 바로는 50cm 이내의 거리였다. 정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실내 화장실로 튀어 들어 피신했고 동석했던 가수 손금자(가명)양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최후의 일발을 가격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 2기 동기생으로 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핵심 자리를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사이에 확인사살이란 인간적 환멸과 증오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재규의 그런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옛말에 "소인은 혁면(革面)하고 군자는 표변(豹變)한다"고 했다. 혁면이란 얼굴, 즉 안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변덕 부리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그 변덕의 한 단면을 혁면이라고 묘사했다. 그에 비하면 군자는 말이 없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번 마음 먹으면 얼굴 표정 바꾸는 변덕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표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잘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덕으로 신임을 거두어들이는 혁면이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표변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재규는 유신 이후 박정희의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함께 "미국 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 등의 반미 발언으로 국가안보 위기를 절감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혁면에 그치지 않고 표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력자로서 변덕과 주색에 빠진 사생활 문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야수'와 같은 표변을 불러 일으켰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술자리 여자를 구해오던, 그 시절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유신독재의 문제와 한미관계의 파탄을 주로 비판하면서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마음 속 창고에는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감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에 담긴 군사법정의 문답내용을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을 처음 감지한 사람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담당한 변호인이었다. 박선호 담당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그의 사건 가담 동기와 그날의 행적 등을 정리하다가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려감을 느꼈다.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동석했다는 여인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바깥에서 술자리 여자를 구해 오는 '채홍사' 역할을 고정적으로 해야 할 만큼 박정희의 주색은 병들어 있었다. 

▲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궁정동 현장.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숨을 거뒀지만, 유신정권은 1970년대 내내 각종 위기상황을 겪어야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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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11일 오후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4회 공판. 


강신옥 변호인
 :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의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네, 그렇습니다."
변호인 : "… 대통령이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고 말하고,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올 때는 '대행사'라고 한다는데…." 
박선호 :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 관계는 참고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박선호의 답변은 목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무언가 꺼리는 말투가 역력했다. 강 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싹 다그쳤다. 박정희의 부도덕성과 타락상이 부각될 수록 '10·26거사'는 그만한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 : "아까 검찰관 신문 시 얘기하다 말았는데 당일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 네."
변호인 : 거기에 간 것은 그 날 연회를 도와 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군사법정을 울린 김재규의 한 마디..."야, 그 얘긴 하지마!"

군사법정에 긴장이 흐르는 사이 작은 외침이 울려 나왔다. 

"야, 그 얘긴 하지마!"

피고인석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기 위해 소리쳤다. 이에 박선호도 '양심선언'의 기회를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그날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 문제를 더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고 하소연 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제가 근무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부장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신임하시고 자꾸 계속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인 : "차 실장은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까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한 푼도 도와주지 않고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그러면 당신이 골라서 해라'고 했다면서요? 그랬더니 '청와대에서 고른다는 걸 국민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골라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 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 "…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국가정보기관의 간부로서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오명까지 쓰게 된 박선호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이에 강신옥 변호사는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교도소 접견 때 이미 그에게서 확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공개해 나갔다. 


▲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10·26에 대한 계엄사 보통군법회의가 끝난 뒤 1980년 1월 중순부터 담당 변호사들은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 여자로 시중에 나도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은밀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법정진술에서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 일절 함구하던 김재규는 어느날 담당 변호사 한 사람을 보자고 연락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여러 비화를 털어놓았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심경의 변화를 보인 모습이었다. 중앙정보부 비밀안가를 거쳐 간 은막의 스타들에서부터 대통령의 자녀에 대한 얘기까지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정희의 비밀안가에 다녀 간 외부 여자가 어림잡아 200명 이상에 달한다는 얘기였다. 김재규는 또 자신이 박정희로부터 신임을 잃기 시작한 이유가 그의 자녀들 문제를 직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탤런트들, '더 깊은 곳' 들어갔다 울고 사정해 빠져나오기도

변호사들은 박선호의 전임 의전과장들을 찾아 청와대 안가 술자리와 여자에 대해 검증하기로 했다. 전임 '채홍사'들인 윤아무개, 이아무개, 김아무개씨(육사15기, 예비역 대령)로부터 김재규의 접견 내용을 검증했다.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인 C, C', C", L, L', W씨 등이 비밀안가의 깊숙한 곳까지 거쳐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모의 H, K씨는 안가의 깊은 곳까지 갔다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빠져 나왔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박정희의 주색 행사는 꼭 부인 육영수씨가 서거한 뒤부터 외로워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육씨가 살아 있을 때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았다. 육씨의 얼굴에 멍 들어 있는 것이 청와대에 접견 차 갔던 외부 여성인사에 의해 목격되기도 했다. 출입기자들이 넌지시 묻지만 박정희의 언짢은 헛기침 하나로 그냥 지나가기 일쑤였다.  

1973년 청와대에서는 경호실장이 사정수석비서관의 방에 가 엽총을 난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경호실장은 박종규, 사정수석은 홍종철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육영수씨가 사정수석을 시켜 경호실장의 뒷조사를 한 것이었다. 육씨는 박정희의 옆에 딱 붙어서 술과 여자까지 챙겨주는 박종규를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했다. 

육씨는 사정수석이던 홍종철에게 박종규의 부동산 보유 현황과 사생활 등을 조사하도록 부탁했다. 우선 박종규의 비리를 캐야 그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수석실의 움직임은 박종규의 정보망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를 알아 챈 박종규는 엽총을 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들어 소리쳤다.

"야, 홍종철. 당신이 내 뒷조사를 한다며!" 

격분한 박종규는 엽총을 두어 발이나 쏘았지만 총알은 천장에 맞고 튀어 나갔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이 한 행사장에서 차지철 경호 실장 등과 함께 자료를 보고 있다. (왼쪽에서 2번째부터 차지철, 박정희,이상열,박종규씨)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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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씨가 생전에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박종규였던 것도 박정희의 술과 여자 때문이었다. 박종규는 육씨가 1974년 8·15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숨진 뒤에야 그 책임으로 경호실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아이러니 이상의 기구한 운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에 관한 비화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만 해도 훨씬 더 많다. 비화를 더 들출 것도 없이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금언을 그대로 입증한 셈이다. 민주정부의 기본 조건은 견제와 균형이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장이든, 대법원장이든, 아니면 중앙정보부장이든 검찰총장이든 모든 국가권력은 견제받는 장치가 있고 상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제 멋대로 휘두르지 못한다. 견제 없는 절대권력자는 반드시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전횡하고 결국 인간의 약점인 도덕적인 금도를 벗어나 쾌락 추구에 빠지고 만다.  

유신은 국민기본권 말살한 '현대 절대주의' 체제 

박정희가 강행한 유신체제야말로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영구히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주정치의 조건인 권력분립과 국민기본권 보장이 무시되고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주의 체제였다. 

첫째,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근거한 개헌이 아니었다. 집권세력이 자의로 작성한 것이어서 사실상 '사문서'나 다름없다. 국민투표도 온갖 부정 투표였다. 그런 국민투표를 통과했다고 해서 그 이전의 위헌적 절차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특별선언과 비상조치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것은 초헌법적 체제 파괴로 사실상 '내란행위'였다.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은 규정돼 있지 않았다. 이는 대통령제를 운영하는 민주 헌정이라면 어느 나라든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규범이다. 

유신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과 1948년의 제헌 헌법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이념으로 이어져 온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국민 주권의 기본규범을 상실한 이단적 통치규범일 뿐이다. 

둘째,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한 뒤 비상국무회의에 유신헌법안을 회부해 의결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되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 대표기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국무회의가 국회의 권능을 대신한 것은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본질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행정부가 입법권까지 행사했으니 이야말로 민주주의 사상가들이 우려한 국가권력의 독점이며 전제체제였다.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한 유신헌법은 집권자가 자기 권력을 자의로 만들어 갖는 절대군주의 행위나 다름없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정치 코미디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유신헌법은 법적으로 원천 무효일 수밖에 없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90% 이상 지지는 공포정치의 산물 

▲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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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박정희의 후계 진영은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률이 모두 90%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고 내세운다. 이른바 개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실시됐다. 언론의 비판적 보도도 금지됐다. 더구나 비상계엄령이 지속되고 군 탱크가 진주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이러고도 무슨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니, 국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하는 행태다. 세계 정치사에 그런 선거나 투표가 있은 적이 없다. 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이른바 '95% 이상 찬성률 공작'이라는 지침을 행정부 공무원들과 관변단체, 그리고 군 간부들에게 강요했다. 

나는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 반독재 학생운동을 하다가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제적당한 채 군대에 강제입영된 소총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 대학의 학생간부 177명을 체포, 고문조사한 뒤 모두 제적시키고 군대로 끌어 넣었다. 그것은 다음해 유신체제를 강행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그 유신헌법의 국민투표를 군대에서 맞은 나는 강압, 공개, 대리 투표의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투표일 아침부터 기표장소는 비밀보호 장치는 아예 없었고 중대 인사계가 한 명씩 들어가는 사병들에게 투표용지를 들이밀었다. 인사계는 투표지의 반대란을 아예 손으로 가린 채 찬성란만 펴서 내밀고 기표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투표할 것을 미루고 있다가 대대장 앞에 불려갔다. 철책선 아래 중대장 막사에 나타난 대대장과 오전 내내 면담이란 것을 했다. 나는 그래도 독대하는 자리여서 대대장에게 항변했다. 

"이런 국민투표는 역사적으로 후대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대대장은 구구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워낙 골치 아픈 존재가 하나 자기 부대에 와 있는 것이고 또 보안부대도 그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시끄럽게 사고만 치지 않게 관리하면 될 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 상병, 차라리 투표하지 말지."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기권한 내 표는 어디로 가고 우리 대대는 1명의 무효표만 빼고 100% 찬성이었다. 내 표를 누군가 찬성으로 기표한 것이다. 무효표 하나는 어느 고참 하사가 인사계의 손에서 투표지를 나꿔채 반대란을 찍었으나 행정요원이 다시 찬성란에 기표한 것이었다. 그 하사는 보안부대에 불려가 폭행당한 뒤 후방으로 전출되고 말았다. 

▲  1972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신교 궁정동투표소에서 부인 육영수씨와 장녀 박근혜씨와 함께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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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한 뒤 만난 학생운동의 동료들은 국민투표를 모두 그렇게 경험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따위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의 지지율을 조작한 것이다. 나는 34개월 이상을 휴전선 철책에서 보초서는 '저항력 없는' 사병이었지만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내 손으로 하지 않은 것을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여긴다. 
국민투표란 직접민주정치의 한 형태지만 그 안건이나 선택지를 합리적 중간집단이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와 노조 등이 그런 중간집단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국민대표 기구인 국회는 물론이려니와 중간집단의 공론이나 검증 없이 집권측이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사례는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와 파시스트 체제가 대중민주정치의 형식을 통해서 배태된 것과 똑같다. 유럽에서 전체주의의 성립과정이 곧 민주주의의 불신과 위기론을 야기한 것도 바로 국민대중은 정치권력의 공작 대상이라는 사실이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넷째, 유신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수 없게 한 헌법조항을 없애 버렸다. 헌법에서 시민적 기본권을 삭제함으로써 후에 독재권력이 긴급조치로 제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신헌법은 또 형사법 절차에서 인권보장 장치인 구속적부심사제를 폐지했다. 

이것만 보아도 유신헌법은 시민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를 부정했다는 증거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신체의 자유를 축소한 것은 18세기 유럽 시민혁명이 쟁취한 초기의 자유민주주의 정신보다도 뒤떨어진 통치제도로 전락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18세기적 이념과 제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사고에 젖어 있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 사실상 임명해 의회정치 유린 

다섯째,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고 일반 법관까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해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인준받아 국회의원으로 임명했다. 또 본래 헌법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일반 법관은 법관추천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도록 규정했으나 이것도 대통령에게 맡겨졌다. 국회와 사법부가 모두 대통령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고 민주주의의 원리인 권력 분립은 없었다. 

권력 분립론은 절대주의 국가주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존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18세기 민주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확립됐다. 박정희 정권이 작성한 권력구조는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한 결과물이다. 그 귀결은 대통령의 절대권력 전횡으로 인권탄압, 언론탄압, 노조탄압과 야당탄압으로 야만국가 시대라는 불행한 역사였다. 

결국 대통령 박정희는 아무런 견제 장치 없는 절대권력자가 됐으며 그 결과 인간적 탐욕의 노예로 전락하는 전형적인 길을 가고 말았다.

박정희의 마지막은 바로 문란한 사생활에서 비롯 된것은 아닌지

역사는 기억되야 하며 반복 되어진다. 그리고 그 역사는 미화 되어서도 안되며 진실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무도’가 알린 日강제징용자 공양탑, 네티즌 힘으로 주변 재정비 세상사

MBC 예능 <무한도전>을 통해 알려진 일본 다카시마의 한인 강제징용자 공양탑 주변이 네티즌들의 관심과 응원에 힘입어 재정비됐다.

한국 홍보 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드디어 지난 주말 일본 다카시마 공양탑 가는길 재정비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재정비에 들어간 비용은 네티즌들의 모금으로 마련됐다. 서경덕 교수팀은 지난달 크라우드 펀딩 업체 유캔스타트와 함께 「다카시마 공양탑 가는 길 정비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서 교수는 “1800여만원을 모금해 주셨는데 이번에 쓴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많은 비용이 남아 있다”면서 “남은 비용은 공양탑 안내판 설치 및 우토로 마을의 역사관 건립비용에 전액 기부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이번에 공양탑 주변 안내판까지 함께 설치하려고 했으나 안내판 내용에 ‘강제동원’의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나가사키시에서 허가를 계속 미루고 있는 중”이라면서 “하지만 반드시 설치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서 교수는 아울러 “공양탑 가는 길이 잘 정비가 됐지만 다카시마 선착장에 도착해 공양탑 입구를 찾는 게 쉽지 않다”며 공양탑을 찾아가는 방법 또한 동영상으로 제작, 유트뷰를 통해 공개했다.

다카시마는 일본 군수 대기업인 미쓰비시가 한국인을 강제 징용한 탄광 섬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한인이 끌려가 비참하게 일하다 목숨을 잃었는데도 이곳은 일본의 근대화 관광지로만 알려져 있다가 지난달 MBC <무한도전>에 소개되면서 큰 관심을 모았다. 

출처: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376

역사속에서 고생만 하시다 가신 이 분들의 넋을 기리는 비의 가는 길 정비를 해주신 교수님의 행동 

너무나 감사 합니다. 

잊지 않고 기억 하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이승만의 막장 업적 3. 친일파 청산 방해 및 와해 세상사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귀국 직후 그는 ‘선(先) 정부수립 후(後) 친일파 숙청’을 주장했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국론분열이나 민심혼란을 이유로 다시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반민법 제정과정에서부터 비협조적이었으며,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이후에는 탄압과 방해책동으로 일관했다. 

반민법이 공포된 1948년 9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내무부 주관 하에 ‘반공 국민대회’가 열렸는데 형식상은 반공대회였으나 실지로는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였다. 이날 대회에서 윤치영(尹致暎) 내무장관 이승만 대통령의 축사를 낭독한 후 “해방 이후 처음 보는 애국적 대회”라고 극구 칭찬했다. 반면 국회는 이날 반공대회가 국회를 적구(赤狗)으로 모독하고 반민법을 반대하기 위한 대회라고 규정하며 이승만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법 반대 국민여론을 조장하는 한편 반민법의 김을 빼기위해 개정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1949년 1월초부터 특위가 와해된 8월말까지 총 80여 회의 국무회의를 열었는데 이 중 11회에 걸쳐 반민법 개정을 논의한 바 있다. 또 이승만 정부의 특위 방해공작은 비열할 정도였다. 특위가 엄연히 법적 기구임에도 조사활동비 등 필요한 예산을 제대로 배정하지 않았으며, 필요한 자료요청도 “침수” “분명치 않음” 등을 이유로 거부하기 일쑤였다. 

한편 친일세력들은 특위 요인 암살을 통해 특위를 무력화를 기도했었다. 반민법 공포 직후인 1948년 10월경 노덕술, 최난수 등 친일경찰들은 특별검찰관 노일환·김웅진, 특별재판관 김장렬 등을 납치한 후 강제로 ‘나는 38선 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 것보다 이북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자필로 써 신문사 등에 보내고는 38선으로 가는 도중에 이들을 살해해 애국청년들이 살해한 것으로 가장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이들이 고용하려 했던 테러리스트 백민태(白民泰)가 암살대상자 명단을 본 후 두려움을 느껴 조헌영 의원 등에게 이 계획을 고백하면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암살대상자 명단에는 이들 외에도 대법원장(김병로), 검찰총장(권승렬), 국회의장(신익희) 등 거물인사 다수가 포함돼 있어 이 음모에는 노덕술 이상의 상충부에서 개입됐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러나 주모자인 노덕술 등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5월 들어 사태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소장파 이문원 의원 등 3명이 남로당과의 연루혐의로 체포된데 이어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터졌다. 앞서 6월 4일 특위는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등 친일경찰들을 반민법 제7조 해당자로 체포하였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 세번째).

헌병대 시절의 사진임.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경대원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특위의 서류와 집기들을 탈취해 갔다. 이날 오후 서울시경 간부들은 회의를 열고 특위 간부 쇄신, 특경대 해산, 경찰 신분보장 등을 요구하였으며,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48시간 이내에 총사퇴를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특위습격사건이 발생한 당일 특위는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3부 연석회의에서 “현재 공무원으로 있는 반민법 제5조 해당자들을 즉시 무장해제 시키고 반민자로 수감할 것”을 결의했다. 반민법 제5조란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 는 내용으로 친일경찰 및 정부 내 장·차관 등 고위인사 가운데 친일 전력자들을 타깃으로 한 것이었다. 

앞서 특위는 1월 14일 이승만에게 반민법 제5조 대상자를 1월말까지 공직에서 자진 추방시킬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형 악재가 줄을 이었다. 6월 중순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져 특별검찰관 노일환과 서용길이 구속되면서 특위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어 6월 27일 소장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백범 김구가 피살되면서 특위는 극도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런 틈을 타서 이승만 측은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7월 6일 이인이 제출한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당초 1950년 6월 20일까지로 돼 있던 공소시효가 1949년 8월말로 단축되고 말았다. 

이에 반발하여 김상덕 위원장을 포함하여 위원 전원, 특별재판관 3인, 특별검찰관 3인이 사표를 제출하였다. 이로써 친일청산에 강한 의지를 가졌던 특위 요인들은 모두 물러나고 이인·송필만·김익진·유진홍 등 친일청산 반대론자나 혹은 친일의 흠이 있는 자들이 특위를 장악하게 됐다. 이들은 8월말로 예정된 특위 해산을 앞두고 업무 정리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국민적 염원을 담아 출범한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그의 주변 친일세력들의 줄기찬 방해책동으로 업무개시 8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파 청산은 후세들에게 역사적 과제로 남겨졌고, 이후 한국사회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이승만의 막장 업적 2. 한강 다리 폭파 세상사

이러한 나쁜짓을 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아닌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운영한 한 인물일 뿐이다. 

아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

▲ 서울을 버리고 이미 6월 27일 새벽 특별 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피란을 떠났다가 대전으로 올라온 상태였다는 점 

▲ 미리 녹음한 라디오 방송 담화를 계속 들려주며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다는 점 

▲ 서울 수복 이후 한강 인도교 폭파의 잘못을 고백하는 대국민 사과문 발표를 국회의장단이 권유하자 거부하고 대신 인도교 
폭파로 피난하지 못했던 국민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형한 점 

▲ 한강 인도교 폭파의 모든 책임을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떠넘겨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집행함으로써 군 통수권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한 점 




이승만의 막장 업적 1. 국민 방위군 사건 세상사


 

 

 

https://namu.wiki/w/%EA%B5%AD%EB%AF%BC%EB%B0%A9%EC%9C%84%EA%B5%B0%20%EC%82%AC%EA%B1%B4

 

 

이이제이 국민 방위군 편. 1(48분부터) : https://www.youtube.com/watch?v=BCSEdKQqtA4

이이제이 국민 방위군 편. 2 : https://www.youtube.com/watch?v=H_G-6hW7o6E

 

 

 

국민 방위군 사건

 

 

사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한국전쟁 당시 군경과 공무원, 학생을 제외하고 17세 부터 40세까지 장정들을 국민 방위군에 편입.

   쉽게 얘기하면 자율(?)에 의한 강제(????) 동원령


2. 이 인원이 50만인데.. 한겨울에 제대로 된 물자지원도 없이 도보로 이동시키며 450km가 넘게 뺑뺑이 돌림. 

    한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0만여명이 사망


3. 그 와중에 윗대가리들이 예산 삥땅쳐서 천문학적인 부정축재.. 

   당시 금액으로 24억이었다고..

 

이것도 근 현대사에선 제대로 알려주는 곳이 거의 없다. 


국부 이승만의 대표적인 업적 중에 하나 인데 



2015년 얼리어답터 정산서 8. Pebble Time 얼리어답터

늘 회사폰(아이폰), 개인폰(넥서스5)를 들고 다닌다. 

회사폰이야 그렇다 쳐도 개인폰 전화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 했다. 

넥5 진동이 약하다 보니 

그래서 스마트 와치로 문자나 전화 놓치지 않게 팔에 차고 다니자

그럼 뭘 사야하지 그러다 가격도 생각해야 하고 

찾다 보니 페블 타임이 눈에 들어 왔다. 모토 360은 밧데리가 조루라 패스

삼성꺼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페블 스틸을 고민하다 

결국 페블 타임이 런칭 되고 바로 구매를 해버렸다. 약 20만원 넘게 비용을 들여서

사용하고 보니 편하다 진동도 바로 오고

한글 지원이 정식이 안되다 보니 한글 언어팩을 스스로 만드는 용자들의 도움을 받아

넥5에 설치를 하고 연동을 하고 보니 정말 편하다. 색상은 빨간색으로 했다. 

전화, 문자, 걸음수 등도 확인 되고 밧데리도 와치스페이스가 좀 화려한거 아닌 이상 4~5일은 거뜬히 가는것 같다.

몇년 써보고 좋은게 나오면 또 갈아 타야 겠다. 

화려하지 않지만 기본기가 좋은 페블 잘 써야 겠다. 

정치는 바로 우리의 일입니다. 세상사

세월호를 통해 알게된 대한민국의 민낯

과거 관심도 없던 내가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건 바로 

세월호!!

아무런 죄없는 아이들이 죽어가는데도 구하지도 않고 

선장은 도망가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아이들은 그렇게 죽어 갔다.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겠다는 유가족의 울부짖음에도 

이 사건을 돈으로 정치로 결부시켜  원천봉쇄 해버리는 죽음의 정권


세월호에 이어 돌고래호도 그렇고 과거 무수한 대형참사에도 달라지지 않는 대한민국

나라가 있으려면 국민이 있어야 하며 국가는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지지 않는 대한민국

4대강, 자원외교 온갖 비리를 자행한 대통령 

그리고 현 정권

더욱 더 부정부패, 비리, 횡령, 회유, 청탁, 매관 매직이 심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양심이 사라지고 어느 누구도 책임 지지도 않고

이런 일이 일어나도 어쩔수 없다고 무기력하게 먹고 사는거에 바빠다는 핑계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딱 그 정권의 수준에 맞는 국민들이 문제인 것이다.

바꿔 나가야 합니다. 사회 문제에 더욱 더 많은 분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정치는 사회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네 삶과 직결된 문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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